폐허의 검은 숨결 안경수의 회화는 시간의 깊이 속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그의 세계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단단하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잔향처럼. 그는 세계의 잔해, 재난 이후의 풍경, 기억되지 못한 시간의 조각들을 그리고 그 속에 침묵의 윤리를 새긴다. 제주의 멈춘 공사장, 해일이 지나간 해변, 홀로코스트의 그림자를 품은 수영장. 그의 시선은 이 장면들을 목격의 증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지 못한 것,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그림의 여백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붓질은 현실을 고발하기보다 현실의 침묵을 기록한다. 색은 차갑게 가라앉고 표면은 매끈하며 구조는 느리게 흔들린다. 그의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응시이며 응시는 곧 감각의 윤리다. 안경수의 개인전 <겹겹>에서는 매끈하지만 그 안에 시간의 더께가 스민 화면이 펼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