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Young Geun

7 July - 23 August 2009 Cheonan
Overview

라리오 천안에서는 오는 7월 7일부터 8월23일까지 박영근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짙고 거칠은 마티에르의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라인더라는 전동기계를 사용하여 빠른 속도로 긁어내는 방식으로 전쟁과 투쟁, 격렬한 운동경기, 질주하는 동물들이나 자동차 등을 그려낸다. 박영근만의 표현기법은 작가 손의 힘, 기계의 속도감과 공격성을 시각적으로 반영하며 그가 잦아내는 실타래 같은 이미지들이 분출해내는 에너지와 힘의 전달을 가능케 한다. 이번 아라리오 천안 개인전에서는 속도, 폭력, 힘, 시간, 생명을 주제로 하여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거장들의 유명한 작품이나 운동선수들의 격한 움직임, 야수들의 몸짓 등을 그만의 언어로 풀어낸 신작 30여 점이 전시된다.

Press release

박영근 -그라인더로 그린/지운 그림
박영택(경기대학교, 미술평론)

이미지 조합
박영근은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그린다. 그 이미지란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거장들의 유명한 작품에서 차용하거나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클릭만 하면 볼 수 있고 취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이미지의 보고 속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이미지를 다시 그리지만 그의 그림 속 이미지는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 재조합되거나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이 배열과 구성은 작가만의 서사나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환생되었다. 그는 이미지의 합성을 통해 모종의 내용을 만드는데 그 내용이란 것이 이미지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짜여졌다. 작가가 미술사나 혹은 인터넷에서 구해온 이미지는 단지 그것으로만 멈추지 않고 그와 연관된 다양한 정보와 함께 다루어진다. 인터넷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도 제공해 준다. 그는 유사한 것들끼리의 공유성 혹은 서로 상반되는 내용들을 한 화면에 밀어 넣었다. 이 편집적 상상력은 컴퓨터 활용으로 얻어지는 정보로 인해 가능한 상상력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차용과 이의 효과적인 수단화에 따른 것이고 무질서하게 동떨어져 있는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그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의미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지의 궁극적인 힘은 조합에서 나온다는 것일까? 그는 여러 이미지들을 조합, 배열하거나 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관성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갔고 따라서 이미지를 단어삼아 문맥을 자의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다양한 이미지들을 파생시킨다. 이 이미지 병치는 의미의 해체보다는 적극적인 서사구조를 갖는 쪽으로 나아간다. 해서 작가는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텍스트를 병치시킨다. 이는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이들을 병치했을 때 야기되는 평면회화의 새로운 힘을 느끼게 하려는 배려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내용’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뒤샹이 레디메이드 작업 역시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이 ‘새로운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고, 자리의 이동이었지 않던가?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박영근 역시 익히 아는 이미지들의 새로운 자리이동, 병치를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와 함께 특정 주제에 맞는 이미지들을 수집해서, 묶어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속도, 폭력, 힘, 시간, 생명 등이 그것이다. 이 주제에 맞게 그림의 방법론이 자리잡는다.

텍스트로서의 그림
작가는 단지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보여주는 것 대신에 그 이미지를 가지고 놀이하듯, 상상과 유추, 혹은 단어와 이미지사이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관자의 개입을 적극 독려하는 그림을 그려나간다. 마치 이미지를 통한 연상작용의 흥미로운 게임을 즐기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미지를 다뤘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들과 작품을 보는 관람자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이미지를 만든 사람들과 관람자들 사이에 끼여 있다. 그러니까 그 둘을 매개하는 존재다. 박영근이 생각하는 화가상이 바로 그런 맥락에 존재(매개자로서의 화가, 매개로서의 그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는 작품에 관한 생각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작품’이란 독자가 보는 것, 읽어내는 것이지만, 작품을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독자가 채워 넣는 것, 보는 이들이 재구성하는 것이 된다. 박영근은 관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적극적으로...
그는 미술사적 지식과 화가와 그림에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 그 이미지와 결부된 다채로운 정보를 동원해 이를 그림 속에 결합시켰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터넷의 활용에 따른, 인터넷의 정보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간추려 말하자면 인터넷 검색을 이용한 그리기일 것이다. 그에게는 해당 이미지와 그에 따른 사연과 내용,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올린 댓글 까지 제공해주는 인터넷의 도움이 결정적인 셈이다. 특히 이미지에 동반하는 수많은 댓글은 의미의 분열적 증식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런 모든 것을 받아들인 후 구상을 하고 이후 자신의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이미지를 화면에 그린다. 정보가 되는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그 이미지를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한 후, 자신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을 그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다분히 사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미지를 단어삼아 텍스트를 ‘짜나간다’. 따라서 이미지와 문자를 결합하기도 하는데 이런 방식은 전통동양화의 구성과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그렇게 보면 그의 즉발적인 그리기, 격렬한 동세, 순간적인 포착, 필의 운동감(그라인더의 움직임), 거의 흑백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화면 역시 동양화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주는 편이다.

시간과 속도 그리고 노이즈
시간과 속도는 현대이미지의 본성이다. 박영근의 회화는 움직임, 속도와 소리를 지닌다.
짙고 어두운 바탕은 거칠고 두드러지는 질감으로 다소 난폭하다.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밝은 색으로 벗겨진 듯한 이미지가 출현한다. 그의 그림은 석고데생처럼 사실적 묘사와 강한 음영대비, 선명한 입체감을 지녔다. 그리고 흑백 톤으로, 단색조로 마감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색채가 입혀지지만 결과적으로는 흑과 백으로 구분된다. 칠하고 벗겨내고 다시 덮고 씻어낸 여러 흔적들 속에서 이미지는 그려진 것, 지운 것 사이에서 진동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려진 이미지는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낯익은 그림의 한 장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을 차용, 패러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다른 작가의 그림과 섞이거나 재배열되어 새로운 이야기, 서사를 만든다. 그는 풍부한 미술사적 상식과 여러 정보를 동원해 자기 식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전개한다. 관자들은 그의 그림 속 이미지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를 잘 읽어보아야 한다. 찾아보아야 한다. 그는 이미지를 빌어 문장을 쓰고 있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감춰진, 잘 드러나지 않는 내용을 파악하고 읽어내도록 권유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는 이야기꾼이고 내용을 중시하고 동시에 강한 시각적 임펙트를 지니면서 독특한 방법론을 구사하고 여전히 묘사의 탁월성, 손의 힘을 증거한다. 근작은 전쟁장면, 투계, 이종격투기나 미시축구 등 운동경기 및 자동차, 승마, 질주하는 말, 동물 그리고 사과와 과일, 꽃 그림 등이다. 꽃을 제외하면 싸움, 투쟁, 경쟁과 야수성, 속도 등을 드러내는 모티브가 주목된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인간 삶, 현실의 은유이기도 하다. 격한 감정을 야기하거나 뜨거운 힘, 격렬한 동세, 속도와 시간의 흐름, 힘의 분출과 소음, 투쟁과 경쟁 등이 우선적으로 감지된다. 그리고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을 자극하고 흡입해내는 편이다. 사실 그가 그려낸 꽃과 과일 역시 운동감과 속도를 지녔다. 작가는 속도와 방향성을 가시화하는 두드러진 질감을 형성한 바탕 화면위에 유화로 대상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렸다. 그리고는 유화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그라인더라는 전동기구를 사용해 대상을 해체시킨다. 그는 좀 더 빠른 그림, 동세와 속도감, 소리 등을 그리려는 의도 아래 그라인더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갈아내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진행되는 그의 작업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약 한 시간이면 거의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머지 20%정도는 시간을 두면서 마무리가 된다고 한다. 여기서 그라인더는 그리면서 동시에 이미지를 지우고 훼손하고 일부러 망친 척 한다. 아니 그라인더 자국이 또 다른 표현기법이 되고 드로잉, 붓질이 되었다. 그라인더는 작가의 신체적 움직임을 신속하게 반영하고 시간과 속도를 각인하며 굉음을 환청으로 유지, 연장시킨다. 우리는 그 소음을 상상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이 기계, 도구를 안고 화면의 표면위에서 몰고 다니는 동작은 기묘한 쾌감과 공격성, 난폭함, 그리고 극도의 세심한 조율 등을 요구하면서 회면과 작가의 신체가 극도로 몰입되는 상황을 연출해준다. 그라인더는 물감 층을 벗겨내고 속살을 드러내면서 그림을 얇게 저민다. 이때 입체와 평면성은 혼재된다. 귓전을 때리는 그라인더 기계의 굉음과 속도에 의해 탄생하는 그 실타래 같은 이미지들의 생경한 조합과 충돌이 그림이 된다. 마치 치과용 드릴을 사용하는 정원철의 판화처럼 정처 없는 선들이 재현과 추상, 그리기와 지우기, 평면과 조각적 영역 사이를 횡단한다. 납작한 평면, 정지된 공간 안에 들어온 이미지의 부동성, 침묵으로 절여진 정지된 회화의 한계를 내파 하는 듯이 동세가 강조되는 이 급박한 화면은 격렬한 속도감과 운동감을 우선적으로 감촉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평면의 매력에 흠뻑 심취해있는 듯하다. 아울러 이 그림에서는 노이즈가 파생한다. 그는 사물이 갖는 소리를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 생명 있는 존재, 사물은 단지 형상과 윤곽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살아있거나 움직이고 소리를 내며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사물에 생명감을 부여함으로써 사물들의 아우라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지들의 시각적 윤곽선을 해체시키면서 자유롭게 그어지는 이 빠른 드로잉 선들은 사물 내면의 기운을 포착하고자 한 동양화의 기운생동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그의 이 자유로운 드로잉은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는 또한 형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생태적 관계망을 환기시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그림은 과잉된 힘으로 불안하지만 그는 확고한 소신과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작업방식과 작업 양과 내용을 통해 거침없이 분출하고 있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래서 그 과잉과 열의는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 된다. 지나는 말로 그는 무겁고 위험한 그라인더를 통제하고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스모선수마냥 살을 찌웠다고 한다. 나는 그의 몸/살로 그린 그의 그림을 다시 보고 있다. 정말 살 떨리는 그런 그림을...

Installation Views
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