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NG Shine: 羽鱗

21 June - 17 July 2011 Seoul
Overview

   

Press release

마음의 원형을 드러내는 의미론적 신체들 -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1. 삶이라는 파토스
적어도 앤디 워홀(Andy Warhol) 같은 유형의 작가에 견주자면, 공시네는 전통적인 범주에 속하는 작가다. 단지 이젤 페인팅이라는 매체적 차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워홀은 자신이 차라리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기계가 문제가 더 적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지만도 않다) 은빛 가발 뒤에 숨은 진짜 워홀은 단지 문제가 적어 보인다는 이유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워홀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는 동안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 중 적지 않은 것들은 너무 무거워 다만 피하고 싶을 뿐인 것들이라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는 모든 존재에게 던져진 보편적 진실이요 질문이다. 어떻든 워홀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기계가 되었으면 했고, 그러한 시각은 그가 만든 것들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하지만 이런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인 담론일 뿐이다. 워홀로 하여금 기계가 되기를 바라게 했던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들은 화가나 시인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가와 시인의 보다 전통적인 지평이자, 바로 공시네가 발을 딛고 서있는 그 지평이기도 하다. 공시네에게도 삶은 문제들과 만나는 여정이고, 그 해결을 찾아나서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 복잡성 때문에 시행착오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곳이자, 상처로 인해 치유가 요구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피해야 할 근거가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이유일 뿐이다. 인생은 함정이 아니라 풀어야 할 숙제일 뿐이란 게 공시네의 회화 저변을 흐르는 생(生)의 철학이다.
하지만 스스로 기계를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해서 워홀은 명성을 택했다. 유명해짐으로써 범박한 생의 드라마들보다 월등한 상부에 위치할 수 있고, 아마도 그 곳에서라면 실존적 고통의 상당부분을 겪지 않고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공시네의 세계는 이러한 지향의 반대쪽 대지에 세워져 있다. 문제를 벗어난 곳이 아니라 문제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것과 함께 있는 거라고 말한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고, 스스로를 닫는 대신 여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곳이야말로 실마리를 풀어야 할 바로 그 곳이며, 꿈꾸고 상상하며 성취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공시네는 화가로서 생에 대한 자신의 성실을 입증해야 할 곳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파토스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 점은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화가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싸워야 할 전장은 위생적인 관념이나 무오(無誤)의 로고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신의 표현을 꽃피워야 할 유일한 곳도 자신이 심겨진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다.

2. 관계 안에 머물기
neighbirds(이웃새), between(사이에서), friendship(친구사이), intruder(방해자) 같은 제목들만 보더라도 한 눈에 들어오듯, 그의 최근 작품들에서는 유난히 ‘관계’가 담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여기서는 새와 물고기, 나무와 쇠가 서로를 허용한다. 상이한 두 개의 화병은 동일한 꽃을 피워낸다. 검정색 숯과 흰색 화장지는 구명튜브로 연결되어 있다. 구명튜브는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기제고, 단절을 넘어 다시 생에 잇대도록 하는 것이다. 공시네의 회화는 이렇게 주어진 것들을 짝짓고, 그 관계 속에서 살도록 조치되는 하나의 상징적인 세계를 자처한다.
관계 속에 있도록 한다 함은 서로에게 서로가 ‘I(나)’와 ‘you(너)’의 수평적 존재로 있음으로써, 즉 내(I) 앞에 있는 대상을 ‘그것(it)’이 아니라 ‘당신(you)’으로 대함으로써 서로를 지지하고 충분해지도록 한다는 의미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따르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내(I)가 진정한 나(I)로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는 설사 그것이 아프더라도 너에게로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 속에 있는 것은 아파하는 것이고, 아파할 때만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아프지 않다면, 그것은 관계 속에 있지 않다는, 즉 떠남과 만남이 아직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관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그토록 일천하고 표피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아픔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삶이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그것이 삶의 본질인 관계 안에 있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공시네는 자신의 회화를 통해 그 요청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세계에 빛이 유입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삶의 고통은 그 안에서만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저자인 톨킨스(J.R.R. Tolkien)를 따르면, 창의력이란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다. 지성은 창의력의 산파역할을 하지만, 창의적 충동 자체는 세상과 더불어 점을 연결하고 소통을 이룰 때 잉태된다. 공시네의 회화들은 무에서 창조되거나 따로 분리되어 생겨나는 물체란 없음을 나지막히 일깨운다. 모든 물체는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치유되고 새로워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럴 때만 거기서 더 많은 것들이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공시네의 회화들이 규모를 과시하지 않아도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실제로 이 세계는 주제의 차원이나 규모의 측면 모두에서 웅대하거나 기념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세계의 중요한 미덕인 가까이 다가서도록 하는 ‘초대의 감각’이 자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시네가 다루는 주제는 한결같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래하는 소박한 기록들이다. 화해와 소통의 작은 염원들, 회복되어야 할 관계들에 대한 묵상….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서는 일이다. 살아가는 이야기, 상처와 기억과 사색의 출처를 향해 조금 더 다가서는 것이 유일하게 권장되는 제의다. 즉 서로의 초대에 응하는 것 외의 다른 외침 다른 웅변은 없다. 웅장한 결어, 복잡 미묘한 해석, 웅변과 설득의 기술, 고도의 미학이론에 기댈 필요는 없다. 니체가 권장했던 ‘결코 현실을 용인하지 않는’ 예술은 여기선 차라리 견디기 어려운 교만에 가까울 뿐이다.

3. 마음의 형상에 신체 부여하기

공시네의 회화는 상상과 재현의 양비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떠오른 형상에 삼차원의 실체를 부여하는, 신체화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의자와 구명튜브를 만들고, 꽃과 화병과 바람개비를 만들고, 그것들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진 일련의 상황들까지 삼차원의 입체로 조형(造型)한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다시 이차원의 회화로 재현해 내는데, 그 과정은 세익스피어가 자신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시인의 비밀에 대해 말했던 대목과 사뭇 닮아있다.
“상상력이 미지의 것들의 형체를 마음에 그려내면 말이야,
시인의 펜은 그것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바꿔주고 허황된 무(無)에다 거주지와 이름을 부여한다 이거야.”
마음에서 발생하는 형상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하는 이것은 화가(畵家)의 신비이기도 하고, 특히 공시네 회화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공시네는 내적 형상에 먼저 조각적 신체를 허용하고, 그것을 다시 회화로 재현하는 이중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 신비에 천착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조급한 서두름 없이 차분하고 정연하고 밟아나간다. 내밀하고 매우 유기적으로 연관된 각 과정은 누락 없이 진지하게 진행된다. 언젠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가 ‘예술가는 이성이 위험에 처할 지도 모르는 곳으로 나가가야 한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공시네는 아무 것도 위험에 처하도록 하지 않는다. 아마도 공시네는 브네의 시각에 전제된 이성과 감성의 대립이라는 미학의 고전적 전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등지거나 유리되어야 할 갈등기제여야 할 이유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포착해내는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사를 정연하게 진행시켜나갈 질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회화는 훨씬 더 촉감적인 뉘앙스를 가진, 작지만 구조화된 것이 된다. 그의 붓은 결코 남발되거나 모자라는 일이 없이 질서와 침착성을 유지하는데, 이는 그것이 그의 손이 이미 감촉했던 세계를 따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삼차원과 이차원의, 곧 신체화와 재현의 이중 경로를 거치는 이 과정이 낳은 회화의 미덕은 적지 않다. 이는 그의 회화가 추상화의 샛길로 빠지거나 예기치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둘릴 개연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이미 손에 의한 조정, 촉감의 검열과 구조의 감독을 사전적으로 거친 후이기 때문이다.
공시네의 회화의 스케일은 정확하게 이 손 공작에 상응한다. 공간감과 질감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붓질은 그 감촉을 기억해내면서 낯설지 않은 세계를 여행할 때의 안도감 안에서 운행된다. 그의 회화가 더 인간미가 있는 따듯한 것이 되는 비결이다. 사진이 포착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사진-사실주의자들의 회화가 그만큼 더 차가워지는 것과 정반대의 이유에서 그렇다.
공시네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사물들은 그것들의 본래 의미에 훨씬 더 근접한 것들로 된다. 무덤덤하고 중성적인 기능체들로 그치는 대신, 마음의 원형을 드러내는 의미론적 신체가 됨으로써 그렇게 된다. 본래적 의미에서 예술은 재료와 대상에,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의 용도와 사용자에게, 그리고 예술가 자신에게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일테면 예술은 신의 작품들에 경의를 표하는 방법인 셈이다. 내 생각에 적어도 공시네의 세계에 등장하는 것들은, 매우 사소하고 모호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모두 각자 더 깊고 풍성한 본연의 자신에 한발 더 다가선 것들이 된다. 작가 자신과 보는 이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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