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NG Suejin

5 July - 6 August 2006 Seoul
Press release
정수진의 양파 - 다층의 추상회화

온갖 종류의 기법과 구성, 형태와 색채가 오버랩된 정수진의 그림. 회화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하려는 듯, 그의 캔버스에는 빈틈이 없다. 철저하게 시각적인 매체, 회화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찾는다며 매혹적이고 세련된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려온 교묘한 작가 정수진의 정체는 우직하게 추상 회화만을 고집해온 페인터다. 정수진이 자신의 작품이 추상의 범주에 있음을 주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의 정수진에 관한 어떤 글에서도 그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추상성과 철저한 시각성이 주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것은 정수진 이외의 어떤 이도 그의 그림을 추상으로 보기 위한 적절한 방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나는 이 에세이가 정수진의 그림에 덧 씌워진 몇 가지 오해를 풀고, 그의 그림이 새로운 회화의 장르임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이자, 무엇보다도 정수진의 추상 회화를 곧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짧은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수수께끼나 알레고리가 아닐까.” 사람들이 정수진의 그림을 두고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세밀하게 묘사된 단단한 도상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화면 구성, 게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문자까지 적혀 있으니, 누구라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하는 충동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정수진의 그림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질문이 틀린 것이다. 정수진의 그림은 철저하게 ‘보는’ 그림이다. 그는 캔버스에 단단한 형상을 가진 도상들을 가득 채워 넣고는 자신의 그림이 추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보는 실마리를 잡기 위한 적절한 질문을 굳이 꼽아본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나 ‘무엇을 볼 것인가’ 정도가 될 것이다.

미술사의 페이지를 점거한 많은 페인터들이 그래왔듯이, 정수진은 시각적인 것, 그리고 회화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집요하게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 범위에는 직접적인 시각 체험과, 다른 페인터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시각과 그리기 방식에 대한 고찰, 선과 색을 올바로 쓰기 위한 훈련, 시각 언어와 그림에 대한 개념적인 글쓰기가 포함된다. 정수진 그림의 독보적인 정체성은 이러한 연구가 유기적으로 진행되며 캔버스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정수진의 그림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얽히고설킨 화면의 구성으로, 그 난해함은 종종 그의 그림을 처음 보는 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하나의 캔버스에서 펼쳐지는 이 다중의 화면을 읽어낼 수 있는 단서는 정수진의 시각 언어에 대한 집필에서 찾을 수 있다. 아직 정리가 덜 된 탓에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정수진은 수년 째 시각언어와 그림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글로 정리해왔다. 정수진과의 인터뷰에서 포착한 대로 그 간략한 개요를 살피자면, 문자나 구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각언어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그것을 증명하고, 다시 문자나 구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 정수진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고유한 시각의 언어라는 것은, “문자 같은 것이다 … 결국에는 시각 이미지만의 법칙 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 핵심을 뽑아내서 실질적으로 사용가능한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언어는 우리가 ‘차원’을 표현하는 데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수진의 캔바스는 이 시각 이미지만의 고유한 다차원의 언어를 시험하는 장이기도 하다.

정수진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크게 네 가지 정도의 다른 레이어가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캔버스 위에 직접 칠해진 색면이 기본 배경을 형성하고, 그 위에 그림의 주인공쯤 되는 인물과 사물들이 그려져 새로운 공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갑작스레 난입하는 새로운 배경이 다른 레이 어를 구성하고, 마지막으로 화면 위에 부유하듯 캔버스 전면에 그려진 물체들이 캔버스와 한참 동떨어진 별도의 공간을 구축한다. 정수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레이 어를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만 정수진의 그림을 철저하게 시각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기반이 마련된다.
하나의 시각을 강요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정수진이 어떤 그림을 그리려 했는지 정도를 파악해 보기 위해 정수진의 2003년 작 ‘사람들’(도1, p000)을 살펴보자. 캔버스 위에 기본 배경으로 상단에는 푸른 색면이 하단에는 붉은 색면이 칠해져있다. 그리고 그 배경 위에 그림의 주인공쯤 되는 인물의 흉상들이 그려져 하나의 레이 어를 형성한다. 그리고 투명 유리의 세븐 일레븐 건물들과 공중전화 박스들이 그려져 아래의 배경과 주인공들과는 무관하게, 다소 투명한 느낌의 새로운 층을 형성하며 개입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 ‘인물들의 흉상’, ‘공중전화박스와 세븐일레븐’과는 전혀 다른 레이어에서 녹색과 백색의 캔이 무리를 지어 깊이감을 지닌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화면의 상단에 보이는 갈색과 황색 계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 역시 캔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부유하고 있다.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이 레이어들의 층위는 화면 속에서 종종 뒤바뀌기도 한다. 이 다층적 구조를 분리해서 보기 시작하면, 반듯한 사각형의 캔버스 위에서 표현된 여러 차원이 드러나며 정신을 산란케 하던 구성에 대한 의문이 다소간 해소되고, 정수진의 새로운 추상을 감상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 충족된다.

정수진의 캔버스에서 복잡한 화면 구성 다음으로 보는 이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현란한 색의 사용이다. 정수진 그림의 뛰어난 묘사력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화면의 구성과 맞물려 그의 그림이 추상이 아닌 알레고리를 품은 작품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단서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의 철저하게 시각적인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연구의 다른 축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즐겨 그린 정수진은, 지금도 캔버스 위에 종종 만화적인 드로잉들을 그려 넣어 기묘한 감각을 선사하곤 한다. 연필과 펜 선에 익숙했던 정수진에게, 처음으로 붓을 들고 색을 써가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펜으로 선을 그을 때는 쉽게 그릴 수 있었지만, 색과 면이 개입되자 갑자기 여러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했다. 선만을 사용해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스스로 느껴져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캔버스에서 선과 색을 쓰는 연습이 필요했고,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하나를 그려도 의도한 바가 모두 담길 때까지 세밀하게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려진 ‘뇌해’ 연작(p.000)이나 ‘무제’ 연작들(p.000), ‘슈퍼마켓’(p.000)과 ‘풍경’(p.000) 등의 그림들은 형태가 없는 것에서부터 단단한 물체들까지, 자연물에서 공산품까지를 아우르는 모든 대상의 그리기에 천착한 정수진의 이력을 증명한다.
2003년, 한 전시를 준비하던 정수진은 문득 붓터치 하나에 그림의 개념과 철학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전시가 끝나자마자 곧 파리로 날아가 세잔느와 고흐, 마네나 모네 등의 붓질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그림에 있어 세밀한 묘사와 붓터치가 자신의 그림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세잔느가 고유한 사과, 혹은 영원히 변치 않는 사과의 본질을 그려내기 위해 재현을 그만두고 다른 색과 터치로 사과를 그려냈듯이, 정수진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각 언어를 담아내기 위한 연습을 지속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수진의 그림에서 수수께끼나 알레고리에 대한 의혹보다도 더 많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 그림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도상들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정수진과의 인터뷰를 얼마만큼 진행 하고나서 나는 이 비현실적이고 엉뚱한 도상들을 크게 여섯 가지의 종류로 분류해 두었었다. 짧게나마 배워두었던 도상해석학의 방법론을 적용시켜 그 숨겨진 의미를 파헤쳐 보고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찾아낸 것은 정수진 작품에 담긴 숨은 의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정수진의 그림을 추상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 여섯 가지 대분류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첫 번째는, 제자리에 있는 듯 한, 별로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하는 인물들과 사물들이다.
두 번째는 캔버스 전면에 드러나는 호두, 양파, 빵, 박카스병, 토마토, 촛불, 접힌 종이, 편의점 등 정상적이지만 배경에 밀착되지 않은 사물들과 생명체.
그리고 세 번째 분류는 두 번째 사물들과 같은 레이어에 있는 정체불명의 사물들인데, 종종 바위, 초콜릿 조각, 혹은 선지나 장기 등으로 추정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네 번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자인데 이 역시 주로 캔버스의 전면으로 부각되어 있다.
다섯 번째로는 토끼머리 모자나, 새의 부리처럼 뾰족한 마스크를 쓰거나, 날개를 달아 변장, 혹은 분장을 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말을 하고 있거나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혹은 단순히 팔이나 다리를 그려 넣음으로써 의인화된 사물이나 동물들이다.

정수진이 스스로 자신의 그림은 추상의 범주에 있는 것이라 언급했던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짐작이 가겠지만, 정수진과 오랜 시간을 인터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상들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할 만한 내용은 좀처럼 제시하지 않는다. 정수진에게 캔버스에 그려진 양파(p.000)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돌아온 답변은 ‘어떤 사물을 생각 했을때, 그것이 너무 보편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것이 아닌 것으로 바꾸고, 그것역시 처음 생각한 사물의 반대로써 처음의 것을 연상시키므로 둘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또 그것조차 아닌것으로 바꾸고 하는 과정을 거친다. 양파 역시 그런 방식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마치 선문답과도 같았던 이 애매한 답변은, 정수진의 그림을 시각적인 다층의 추상회화로 보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본질을 담고 있었다. 이는 그의 모든 그림에 적용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정수진이 설명하는 양파의 의미에 대한 답변을 풀어보면,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도상들이 가진 상징과 언어적 의미를 끊임없이 퇴화시켜 시각적인 속성만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내용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정수진은 애당초 상징의미가 적은 사물들을 골라 그것이 전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그려 넣거나, 아니면 아예 이 세상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캔버스에 그림으로써, 또는 전혀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상태로 변장시킴으로써 시각적으로는 단단한 형태를 가지지만 논리적, 언어적, 상징적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은 도상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정수진은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도상들을 ‘껍데기’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도상들이 기의가 완전히 제거되고 시각적인 기표만이 남도록 의도된 것임을 알리는 적절한 표현이다.
결국 우리가 정수진의 페인팅을 ‘철저하게 시각적인 다층의 추상회화’로 보는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핵심은, 우리가 그림에 대해 평생 동안 지니고 있던 선입견을 과감히 버리고, 정수진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도상들이 아무런 언어적 의미가 없는 선과 색과 공간을 이루는 시각요소일 뿐이라는 새로운 선입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정수진의 양파는 양파가 아니다.

‘저 그림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수진의 그림에 도상해석학의 도구를 적용해보고자 했을 때에, 질문의 전제와 반대가 되는 새로운 전제가 확보되었다. 정수진의 도상들은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도록 의도된 도상’들이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전제를 가지고 정수진 작품 속 도상에 담긴 몇 가지 의도들을 다시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앞서 나누어두었던 첫 번째 분류에 속하는 정수진 그림 속의 정상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무심한 표정에 경직된 자세이다. 정수진은 여기서 사람이라는 기표가 ‘사람’외에 더 많은 의미를 생성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적어도 보는 이들이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나 동세로 말미암아, ‘사람’이라는 기표 외에 웃는 사람이라거나 화난 사람, 또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다른 의미들이 더해지지 않도록 의도했다는 이야기다. 첫 번째 분류에 속하는 사물들도 마찬가지인데, 특별한 구도나 특정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다른 의미가 더해지지 않도록 무미건조한 구도와 가장 전형적인 색상으로 그려졌다. 두 번째 분류에는 양파가 들어있다. 정수진 그림 속의 호두, 양파, 빵, 박카스병, 접힌 종이들도 마찬가지로 더 많은 의미의 개입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나 정면성을 띈 구도로 그려졌고, 허공이라는 엉뚱한 위치에 그려져 어떤 호두, 어떤 양파, 어떤 빵이 아니라, 그저 호두, 양파, 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적인 기표로서만 작용하도록 의도되었다. 세 번째 분류에 속하는 정체불명의 사물들은 참조의 대상이 없는 가상의 존재들로, 이들은 애초에 시각적인 기표들이다. 그러나 ‘초콜릿 조각이나, 바위, 선지나 장기 등으로 추정’된다고 서술했듯,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분류에 속하는 이미지들보다 더 많은 기호들을 연상시킨다. 네 번째 분류 역시, 색을 가진 선들로 ‘문자’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세 번째 분류와 비슷한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세 번째와 네 번째에 분류에 속하는 도상들은 ‘이 세상에 시각 이미지로서 존재하고 있을 법한’ 것들이다. 첫 번째 두 번째 분류에 속하는 기표와 기의를 가진 이미지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언어적 기호들을 연상시킴으로 해서 기호적 의미가 연기처럼 분산되도록 만든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분류에 속하는 것들은 두 번째 분류와 세 번째, 네 번째 분류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들로, 토끼변장을 한 사람, 사람의 머리를 한 인간들, 팔 다리가 달린 연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명확하게 지칭하는 대상이 없으며, 그것이 그 자리에 있어야할 논리적 이유가 없다. 동시에 첫 번째 분류에 속하는 정상적인 도상들과는 달리 많은 것들을 연상케 하는 표정이나,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세 번째 분류에서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의미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어 의미의 존재자체를 뭉뚱그리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에, 사실 정수진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도상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보다 발전된 단계에서 서로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퇴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들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카테고리를 분석한 것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정수진의 도상들이 ‘의미들을 퇴화하기 위해’ 그려진 이미지라는 전제를 설정하고 진행된 것들이다. 따라서 작가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나, 각각의 도상들을 그리면서 연상했을 이야기나 내러티브 등에 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수진 역시 자신의 그림은 시각적인 추상의 범주에 가까운 것이며, 사적인 이야기나 감정 보다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각의 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나 역시 작가로부터 그의 그림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받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다음 단계의 분석과 해석은 정수진의 그림을 바로 보기 위한 기틀이 마련 된 뒤에 진행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 프로젝트도 의뢰해 놓은 상태이다.

정수진의 작업들이 철저하게 시각적인 추상회화임을 증명하는 단계에서, 추상을 그리고자 한 그가 색면 추상대신 집요한 묘사를 선택한 사연 또한 유추할 수 있었다. 글의 전반부에서 언급했듯이 그림의 다차원성을 연구해온 정수진은 자신의 그림에서 여러 겹의 레이어뿐만 아니라 다차원의 공간감을 표현해내야만 했다. 색과 면으로는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들을 구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방향성과 깊이, 층위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림에서만 가능한 다차원성을 표현하기 위한 단단한 물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정수진의 연구에 자신의 시각언어를 발화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그리기를 생각한다면, 그 반대의 과정, 청취로서의 그림 보기도 상정할 수 있다. 정수진이 이야기한 ‘한 번의 붓질에도 들어가는 개념’과 그리기에 대한 천착을 연상한다면, 다른 그림들을 읽어내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단단한 도상들을 그려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수진은 다른 사람의 시각언어를 들으며 자신의 말하기를 발전시키고, 또 반대의 과정을 통해 시각 언어에 대한 연습을 지속했던 것이다. 정수진이 다른 그림을 볼 때에도 자신의 그림을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시각적인 차원에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그녀와의 짧지 않은 시간의 인터뷰 중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가 자신만의 시각이론을 통해 읽어낸 사실들로 종종 미술사의 정론이나 근현대 미학이론에 부합하는 사실들을 날카롭게 집어내거나, 그 이상의 맥락을 읽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각 언어에 대한 이론이 정리되어 공개되면 보다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라파엘전파Pre-Raphaelite의 그리기 방식을 근대적 회화의 시발점으로 지목한다거나, 인상파 화가들 간의 시각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정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미술이론과 텍스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수진이 철저하게 자기 스스로 확보한 시각의 언어로 다른 그림들을 읽어내는 훈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언어로 그림 읽기가 유효하다는 사실들로부터, 다시 정수진 그림에 담긴 추상성과 시각언어에 대한 신뢰가 더해진다.

이 도록의 뒤쪽에 실린 최근의 작가노트(p.000)에는 정수진의 그림을 구성하는 다중의 화면과 시각 언어, 그리고 선과 형의 의미에 대한 다소 간접적인 서술이 담겨있는데, 그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이론이 거의 정리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최근작들에서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 또한 정수진의 시각언어에 대한 연구가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먼저 지나치게 복잡하여 종종 보는 이에게 압박감을 안겨주던 정수진식 다차원의 구성이, 새 그림들에서는 편안하게 느껴질 만큼 안정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다중의 구성을 압축이라도 한 듯 단정한 느낌을 전달하는 그림 ‘나는 물개’(p.000)는, 근작들 사이에 놓여있지 않으면 정수진의 그림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다. 작은 사이즈의 ‘방’(p.000)이나 ‘저녁’(p.000)과 같은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새 그림들의 또 다른 특징은, 캔버스의 전반에 걸쳐 작품을 꽉 채우던 세세한 묘사 대신 여유롭고 거침없는 붓놀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수진이 다중의 공간구성과 세밀한 묘사에 대한 압박감에서 해방되었으며, 그의 시각언어가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두 가지 특징들은 사실 이번 아라리오의 전시에 출품되는 모든 그림에 걸쳐 드러나, 기존의 작업들과의 확연한 차이점을 확보한다. 정수진 그림의 다중적 화면구성이 작가 자신 외의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안정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정수진이 시각 언어로 안정된 시각 언어를 발화하는 데에는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정도에 이르러 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예전에 비해 확실히 자유로워진 붓질과 묘사력에서는 그의 캔버스가 보다 많은 개념과 철학을 담아낼 수 있는 더 큰 화면이 되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수진의 새로운 추상은 다음 세대의 담론들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중에서도 글을 마무리하며 조금이나마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근현대 회화사의 맥락에서 정수진 그림이 위치한 지점에 대한 논의이다. 정수진의 그림, 다층의 추상회화가 자신의 도상을 거부하는 과정은 벨과 프라이, 그린버그를 위시한 모더니즘 회화론의 자기 참조적인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정수진의 그림 역시 철저하게 회화의 범주 안에서 시작된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 한 점은 정수진의 그림이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는 과정은 근대회화의 자기비판과 반성이 아닌 노골적인 자기거부Self-denial라는 새로운 노선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자신에게 드러나는 도상들에 대한 거부임은 물론이거니와, 모더니즘의 반대 노선에서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거부이다. 따라서 평면 안에서의 다차원성이라는 다른 논의를 제시면서도, 순수하게 시각적인 매체를 향하는 목표를 공유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추상회화의 장을 열어갈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회화는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시각적인 속성들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담론들은 주로 사회적인 컨텍스트와 맥을 같이 한다. 정수진의 그림과 시각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했던 회화와 시각성에 대한 담론들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연결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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