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G Guangyi

19 May - 28 June 2006 Seoul
Press release
왕광이 - 격렬한 근대의 초상

우리는 지난 15년 동안 새로운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들이 출현하고, 문화적 다양성에 관한 주장들이 강화되고, 민족과 지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도시들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봐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200여 년간 지속되던 서구 중심적 사유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러 면에서 1989년은 이러한 전지구적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동서독의 통일과 구소련의 해체, 중국의 천안문 사태, 이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의 소멸과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팽창, 그리고 인터넷의 발명은 인류의 기억과 삶의 공간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을 예견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분수령이라면,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의 탄생으로 대변되는 1989년!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난 세기의 상처와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떤 미래로 향하고 있을까.

왕광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과 공존으로 대변되는 20세기의 상처와 영광 모두를 그의 몸속에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는 작가이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사춘기를 보낸 왕광이는 공산당으로부터 인테리겐차로 지목되었고, 사상개조를 위한 재교육시설에 4년 동안 수감되었다. 20살이 되었을 때 중국정부에 의해 결정된 그의 첫 직업은 철도 노무자였다. 또한 그의 작업 속에는 중국 현대 미술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1980년, 그가 24살 때 항주에 있는 절강미술학원(지금의 중국미술학원)에 입학한 이후, 왕광이는 언제나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두에 있었다. 때로는 작가로, 때로는 기획자와 평론가로서 그의 삶과 작업은 언제나 변화를 주도했고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주도한 ‘북방 예술가 그룹’은 중국 현대미술의 시발점이었고,!
이후 중국 전역을 휩쓴‘85 미술 신조류’운동의 모체였다. 차이나 아방가르드의 주요한 두 경향 중 하나인 ‘정치적 팝’ 스타일은 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왕광이의 ‘대비판’시리즈를 설명하기 위해 그에게 헌정된 용어이다. 그러니 모든 연구자들이 그를 중국 현대 미술의 대부로 명명하기를 서슴치 않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중국의 급격한 개혁 개방과 자본주의화라는 정치 경제적 변화는 왕광이를 비롯한 중국 현대미술에 전혀 새로운 환경과 기회를 제공했다. 사스키아 싸센(Saskia Sassen)이 말한 대로 1989년 이후의 ‘전지구적 도시’들은 정치, 경제, 문화적 권력들의 집중이 가장 강력히 일치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를 통해 중국이라는 강력한 자본의 제국과 그것을 상징하는 북경이라는 전지구화된 도시가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거기다가 1993년의 베니스 비엔날레와 호주 트리엔날레를 통해 차이나 아방가르드가 세계 미술계의 주요 동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지난 15년 동안, 영국 현대미술과 더불어 중국 현대 미술은 영상 설치로 치닫던 국제 미술계에 회화의 복권을 가져왔고, 미국 주도 현대미술이 다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변화에 의해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북경이라는 도시가 단숨에 ‘전지구적 도시’로 탈바꿈되었고, 전지구적 문화권력의 재배치에 따라 차이나 아방가르드가 국제 미술계의 주류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왕광이의 작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중국 특유의 정치 사회적 환경과 이러한 국제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왕광이의 삶과 작업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처와 영광이 공존하고 있다. 내가 그의 작업들을 ‘격렬한 근대의 초상’이라고 명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류가 지난 세기에 실험한 모든 사회구성체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비판이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중국 국내에서만 호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도시들에서 국제적인 언어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왕광이는 이미 그의 작업의 배경과는 무관하게 자본과 대중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작업을 형식적으로 구분하고, 도상학적으로 분석하고, 가격을 메기기 전에, 작가적 삶의 절박함과 치열한 자기비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내 삶의 선배이자 동료였고,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해 왔다. 이 작은 글과 도록은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들에 대한 추억이자, 그의 삶과 작업에 대한 조그만 헌사이다.

윤재갑(아라리오 베이징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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